조지 타케이(George Takei)에 대해 당신이 모르는 아홉 가지 사실

스타트렉, LGBT, 그리고 소셜미디어의 아이콘 조지 타케이와의 대화
George Takei at a Star Trek convention in Las Vegas | Photo courtesy of George Takei

조지 타케이가 스타트렉(Star Trek)의 술루(Sulu)로 가장 잘 알려졌던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그는 80세에 배우의 꽃을 피운 사람이자 대중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2005년에 커밍아웃을 한 후, 그는 결혼 평등과 동성애자의 권리를 주장해왔습니다. 또한, 그의 가족과 같이 제 2차 세계 대전 중 강제 수용소에서 수감 생활을했던 수천 명의 일본계 미국인의 이야기를 수십 년 동안 계속해왔습니다. 그의 페이스북 팔로워는 천만명에 이르며, 재치있는 토막뉴스와 정치적 이슈가 담긴 포스팅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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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Takei at the opening day for "New Frontiers" | Photo courtesy of JANM, Facebook

2015년, 타케이는 전쟁 중 투옥 된 시간을 기반으로 한 뮤지컬 "충성(Allegiance)"에서 브로드 웨이 데뷔 무대를 가졌습니다. 그가 1992년에 설립을 도왔던 일본계 미국인 국립 박물관(Japanese American National Museum)에서 현재 그를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뉴 프론티어: 조지 타케이의 세계(New Frontiers: The Many Worlds of George Takei”로 명명된 이 전시회에서는 조지 타케이의 삶과 업적을 되짚으며 그의 후지산 등반과 1973년 로스앤젤레스 의원 출마와 같은 이슈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전시회는 2017년 8월 20일까지 진행됩니다.

미국인들이 인생의 2막을 살지 않는다고요? 타케이는 이미 6막의 삶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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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cific Overtures" | Photo courtesy of George Takei

우리는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태평양서곡(Pacific Overtures)이 끝난 밤에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1853년을 무대로한 스티븐 손드하임(Stephen Sondheim)의 뮤지컬로, 일본에 상업적 침탈을 노리던 미국의 모습을 일본인의 시각에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타케이는 뜨거운 물을 연신 마시며 말을 했지만, 그의 바리톤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독특하게 들렸습니다.

1. 그가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그리워하는 것

“저는 날씨가 가장 그립습니다. 뉴욕의 겨울은 매섭고 여름 역시 다른 의미에서 매한가지로 버티기 힘든 곳입니다. 습도도 정말 끔찍하고요.”

2. 날씨 외에 그리워하는 것

“로스앤젤레스의 모든 것이 그립지만, 특히 다운타운이 더욱 그러합니다. 로스앤젤레스의 다운타운은 정말 역동적입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에 건물 높이 제한이 있었는데, 저는 그 제한이 풀리던 시기를 기억합니다. 이제 로스앤젤레스는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들로 가득하고 확실히 대도시의 면모를 풍기고 있습니다.”

3. 로스앤젤레스의 극장가를 사랑하다

“우리는 오랜 기간동안 센터 시어터 그룹(Center Theatre Group)을 찾았습니다. 애먼슨(Ahmanson)도 그립고, 마크 테이퍼 포럼(Mark Taper Forum), 오페라, 심포니, 디즈니홀과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Dorothy Chandler Pavilion)도 정말 그립습니다. 극장에 가기 위해 뮤직센터 플라자를 거닐고 켄달 블랑제리에서 공연 전 식사를 하던 사람들 역시 잊을 수 없지요.”

4. 그는 거의 건축가였다

“제 아버지는 부동산업에 종사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건축가가 되기를 바라셨죠. 아마 제가 건축가가 되어 빌딩을 짓고 ‘타케이 부자 부동산’이라는 회사를 세우길 바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UC버클리 시절 아버지의 꿈을 이뤄줄 좋은 아들이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2년 후, 제 마음 속의 꿈이 더욱 뜨겁게 불타올랐고 결국 로스앤젤레스로 오게 되었습니다.” 타케이는 결국 UCLA에서 연극으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5.그는 로스앤젤레스와 자신의 역사를 알고 있다.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은 모두 징집되어 있었지만 니시 홍 완지(Nish Hongwanji) 불교 사원에는 징집될 필요가 없었던 승려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배리 골드 워터 (Barry Goldwater)의 먼 사촌 인 줄리어스 골드워터(Julius Goldwater)라는 백인 남성이있었습니다. 그 사원은 리틀 도쿄(Little Tokyo)가 텅 비게 되면서 줄리어스가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남부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이주하게 되었는데요, 리틀 도쿄는 브론즈빌(Bronzeville)이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공동체로 변모하였습니다. 이들은 골드워터에게 사원에서 예배를 할 수 있는지 부탁했고, 그는 사원을 개방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사원에서 일요일마다 아프리카 계 미국 남 침례교(African American Southern Baptist) 교인들의 할렐루야 박수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6. 건축에도 조예가 깊다

“1920년대 중반에 신자들은 전통적인 일본 사원이 지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르 데코(Art Deco)의 지지자였던 건축가를 고용했습니다. 건물의 정면을 보면, 전통 일본 불교식 입구를 볼 수 있지만 그 옆에는 아르 데코풍의 이집트식 기둥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이런 불교 사원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원은 이후 일본계 미국인 국립박물관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7. 그를 주제로 한 전시회가 개최되기 전부터 일본계 미국인 국립박물관을 후원해왔다

“이 박물관은 정말 제 아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물관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쭉 지켜봐왔는데요, 1992년에 처음 개관되었을 때 길 건너의 주차장에서 개관식을 진행하려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 행사의 감독이었지요. 그런데 당시에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발생하게 됩니다. 동남쪽과 서쪽에서 연기가 자욱하게 발생했기 때문에 결국 건물 안에서 개관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8 년에 그는 파트너 Brad와 일본계 미국인 국립박물관의 데모크라시 포럼(Democracy Forum)에서 결혼했습니다.

8. 그는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언론 묘사에 대해 엇갈린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적이면서 동시에 저의 인생에 있어 포부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언론에 의해 확산된 관념때문에 제 가족과 다른 120,000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전쟁동안 징집되었습니다. 제 인생의 목표는 바로 이것을 미국 역사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9. 그는 다음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타케이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충성"을 다시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